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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장 1-2절

사도행전 1:1-2

1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2 그가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100주년 기념교회 2005년 8월  14일 이재철목사님 설교 말씀 기록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2절 말씀 보시겠습니다.

신약 성경 187쪽입니다.

사도행전 1장 1절에서 2절 신약 187쪽입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에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여노라.

아멘.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수신자인 데오빌로에게 자신이 먼저 써보내었던 누가 복음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사도행전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그에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여노라.

 

누가는 자신이 기록한 누가 복음의 핵심 즉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단 다섯 개의 동사로 정의하였습니다.

행하셨고 가르치셨고 사도들을 택하셨고 성령으로 명하셨고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 대해서 이보다 더 간결하고도 정확한 표현은 힘들다고 생각이 됩니다.

누가는 누가 복음을 기록한 당사자였기에 자신이 기록했던 누가 복음의 진술을 이처럼 불과 다섯 단어로 명쾌하게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4주 동안 순서에 따라서 이 다섯 동사 중에 네 동사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동사는 승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와 관련해서는 사도행전 1장 9절에서 11절의 내용이 상세하게 증언해 주고 있기에 그때 깊이 고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교회의 역사와 주님을 쫓는 사람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사도행전의 서두를 왜 누가는 예수님의 생애를 단 다섯 단어로 정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 했겠습니까?

교회와 크리스찬의 삶의 근거가 바로 그 다섯 단어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것을 행하고 주님의 가르치심을 따르고 주님으로부터 택함 받은 사도 답게 주님의 메시지를 품고 이 세상을 살고 성령님의 명령에 무조건 절대 굴복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되 삶의 궁극적 목적을 세상에 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두는 사람들이 크리스찬이며 그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예배당 밖 일상의 삶 속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비추는 복음의 화면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바로 이 다섯 단어를 우리의 삶으로 구현해야 됨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유의하고자 하는 것은 이 중요한 사실을 우리는 누가의 기록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누가의 기록이 없었던들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주님을 믿는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쾌하게 이해하기도 힘들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이정표가 되는 사도들의 행적과 교회를 통해 성령님께서 얼마나 크게 역사 하셨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 혼탁한 세상 속에서 크리스찬으로 살아가는 것은 복음서가 전언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믿는 자들의 삶 속에 또한 그들의 삶을 통해 주님께서 얼마나 크게 역사 하시는지를 누가가 기록한 사도 행전이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귀중한 기록을 우리에게 남겨준 누가에게 고마움을 느끼면서 우리를 위해 누가로 하여금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을 쓰게 하신 성령님께 더욱 깊이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록의 중요성은 참으로 지대합니다.

기록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습니다.

 

한반도에서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가 수천 년 전 아프리카 이집트에서 거주하던 사람들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이 남긴 기록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기록도 이처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면 주님에 관한 기록이야 두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인간의 인간에 대한 기록은 사실 혹은 정보의 전달로 끝나지만 인간의 주님과 관련된 기록은 언젠가는 어디에선가는 사람의 심령을 움직이는 성령님의 도구로 쓰이게 됩니다.

 

제 아버님께서는 1963년 초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시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이후로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 부친께서 남기신 신앙의 글들은 제 가슴을 뭉클하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떠나실 당시 아버님의 연세는 54세셨고 저는 우리 나이로 15살이었습니다.

이제 세월이 흘러서 제 나이 57세가 되었습니다.

아버님께서 이 땅에 살아 계시던 연세보다도 제가 3살이나 더 많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 아버님의 글이 주는 감동이 줄어든 것은 전혀 아닙니다.

제 나이가 70이 되든 80이 되든 저는 그 글을 대할 때마다 제 옷깃을 여미게 될 것입니다.

제 나이에 상관없이 그 모든 글들은 저를 사랑하시던 제 아버님께서 저를 위해 남겨주신 믿음의 글들이기 때문입니다.

96년에 8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던 제 어머님의 글들 역시 구구절절이 제 자신을 바르게 곧추세워주는 믿음의 거울이 되고 있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은 기록과 거리가 멉니다.

한 주간을 살아가면서도 일주일 내내 단 한 줄의 기록도 남기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떠난 뒤에 유품을 정리해도 기록다운 기록이 하나도 없는 경우가 태반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주님 안에서 이루어지는 믿음의 기록은 단순한 문자의 조합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 죽음 이후까지 우리의 삶을 이 세상에 연장시켜 줍니다.

내가 살아 생전에 남긴 몇 줄의 글이 내가 이 세상을 떠난 뒤에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는 교우님 여러분들께 하루에 단 한 줄이라도 주님 안에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한 사랑의 기록을 남겨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를 주님께서 주셨던 깨달음을 주님을 향한 나의 회개를 주님 안에서 사랑할 수밖에 없는 사람에 대한 사랑의 고백을 겸허하게 기록해 보십시오.

 

그 사랑의 글을 곤히 잠든 아내의 머리맡에 올려 두십시오.

아직 퇴근 전인 남편의 책상 위에 두십시오.

등교하는 자녀들의 가방 속에 넣어 주십시오.

주님 안에서 사랑해야만 하는 사람들에게 우편으로 붙여 드리십시오.

반드시 긴 글이 아니어도 상관없습니다.

명문장이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명필이 아니라고 해도 문제될 것은 전혀 없습니다.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주님 안에서 쓰여진 글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 글은 언젠가는 반드시 주님의 뜻으로 누군가의 인생을 새롭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의 품에 안긴 뒤에도 우리의 삶이 우리가 이 땅에 남겼던 기록을 통해서 후대 사람들과 이 땅에서 공유된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난 뒤에 천국에서만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실은 우리의 기록을 통해 이 세상에서도 영원히 살게 됩니다.

마치 누가가 자신이 기록한 누가 복음과 사도 행전 속에서 오늘도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오해하지는 마십시다.

기록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러나 주님을 믿는 크리스찬 들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들 가운데에 기록이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기록하였다고 번역된 헬라어 포이에오는 행한다는 의미의 동사입니다.

누가가 예수님의 전생애를 단 다섯 개의 동사로 정리하면서 가장 먼저 행하셨다고 표현할 때 사용했던 헬라어와 똑같은 동사입니다.

2000년 전에 누가가 자신이 사랑하는 데오빌로 그러나 공간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데오빌로를 위해서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일이 그에게 복음을 기록해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데오빌로에 대한 누가의 사랑이 그 상황 속에서 기록의 형태로 드러난 것입니다.

따라서 누가의 기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것은 인간에 대한 누가의 사랑이었습니다.

만약 누가에게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었더라면 누가가 한 인간을 위해서 이 장문의 글도 쓰지 않았겠지만 설령 썼다 할지라도 혹 그 글이 사료로서의 가치는 지닐 망정 생명의 말씀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누가가 데오빌로라는 한 인간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를 위해 기록한 그의 기록물들이 생명의 말씀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것이 사랑의

결과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생명의 통로가 될 수 있고 생명과 사랑은 구분되지 않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께서는 곧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장으로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우리에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오랜 시간 혹은 오랜 기간 동안 인내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래 참는다로 번역된 헬라어 마크로 휘메오는 휘오라는 동사에서 파생되었는데 그 뜻은 희생한다 제물로 바친다는 것입니다.

사랑은 소극적인 인내가 아니라 적극적인 자기 희생이요.

나아가 자신을 제물로 주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의 제사를 생각해 보십시다.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소나 양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제물로 바친다는 것은 죽인다는 말입니다.

바로 소나 양이 희생을 당함으로 그 대신에 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제사를 가리켜서 희생제사라고 불렀습니다.

 

인간의 사랑도 이와 똑같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태어난 자식들은 부모의 희생 속에서 성장하게 됩니다.

부모가 희생하는 만큼 자식은 크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 든 후에도 우리 부모님들만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지는 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이 부모님들의 끝없는 희생 속에서 성장되고 또 보존되었기 때문입니다.

 

<계속>

 

 

[이재철목사] 사도행전(5) 1:1-2 '기록하였노라' 설교 말씀 기록 (2/2) 은혜의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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