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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5 하나님의나라

 

사도행전 1:3-5

[개역개정]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라

 

[개역한글]

3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100주년 기념교회 2005년 9월  4일 이재철목사님 설교 말씀 기록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00주년 기념교회 설교영상 및 음성파일(바로가기)

 

 

 

하나님의 말씀은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187쪽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서 5절 말씀입니다.

신약성경 187쪽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600년 전에 하나님께서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서 유태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의 하나님이 한 나라를 세우시기니 이것은 영원히 망하지도 아니할 것이오.

그 국권이 다른 백성에게 돌아가지도 아니할 것이오.

도리어 이 모든 나라를 처소 멸하고 영원히 설 것이라.

동서양을 막론하고 세상 나라의 모든 주권은 새로 발응하는 강자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의 주권은 이 세상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영원한 주권임을 하나님께서 진히 밝히셨습니다.

당시 유대의 멸망으로 유대 백성들은 바벨로니아의 지배하에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 말씀에 근거해서 메시아 왕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꿈을 키워 왔습니다.

 

그리고 메시아 왕국에 대한 유대인들의 꿈은 예수님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들이 꿈꾸는 메시아 왕국이란 이 땅에 도래한 메시아가 지배자인 로마 제국을 몰아내고 유대 주권의 회복과 새로운 부흥을 안겨주는 철저하게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의미에서의 왕국이었습니다.

그들이 처음 예수님께 열광했던 것은 그들이 꿈꾸던 메시아 왕국의 가능성을 예수님에게서 엿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유대 독립을 안겨다 줄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사실로 인해서 실망한 유대 민중들은 도리어 빌라도 총독에게 예수님을 국사범으로 고소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로마 황제에 대한 세금을 금하고 자칭 왕이라 칭했다는 등의 죄목이었습니다.

유대 민중들이 정치적 메시아가 아니라는 이유로 예수님을 고소하면서 그 예수님을 정치적인 국사범으로 몰았다는 것은 크나큰 모순이었습니다.

자고로 자기 집착에 빠진 인간들은 이처럼 자기 자신에 의해 자행되는 자기 모순을 늘 깨닫지 못합니다.

 

빌라도 총독은 국사범으로 끌려온 예수님을 신문하면서 내가 과연 유태인의 왕이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을 요한복음 18장 36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다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태인에게 넘겨주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나라 즉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그 어떤 나라와도 같지 않음을 아예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님을 분명하게 밝혀주셨습니다.

예수님의 고백처럼 만약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나라였더라면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체포당하는 것을 하나님 나라의 군병들이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갯세마네 동산에서 유태인들에게 체포당하실 때 그 현장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흥분한 베드로가 칼을 뽑아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유대인에게 휘둘러 그의 귀를 베었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칭찬하시기는 커녕 되려 크게 난무라셨습니다.

내 칼을 칼집에 도로 꽂아라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께 당장의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들을 내 곁에 세워주실 것을 청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느냐

당시 로마 제국의 한 군단은 보병 6,100명과 말 726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열두 군단 이상의 천사를 부르신다면 그 규모가 얼마나 크겠습니까?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던 유대인들이 감히 예수님께 범접조차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칼로 대변되는 권력을 믿다가 권력 때문에 망하는 세상의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직접 신문했던 빌라도 종독은 예수님에게서 소위 세속적 의미에서의 그 어떤 역모의 기미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한 나라는 세속적 권력을 지향하는 나라가 아님을 본인이 분명히 알았기 때문입니다.

빌라도 총독은 두 번씩이나 유태민중에게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했지만 유태민중은 반역자를 방면한다면 그것은 로마 황제에 대한 반역이라고 빌라도 종독을 압박했습니다.

예수님을 그냥 석방한다면 빌라도 종독을 반역자의 동조자로 로마 황제에게 고소하겠다는 위협이었습니다.

결국 유대민중의 협박에 굴복한 빌라도 종독은 예수님께 사형을 선고했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 3절의 증언입니다.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서 40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십니다.

 

해를 당하신지 사흘째 되는 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더 이 땅에 머무시면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 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유대민중의 오해로 인해 국사범으로 몰려 처형당하셨던 주님의 관심은 부활 이후에도 오직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목적이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인간에게 최초로 행하셨던 설교 메시지의 내용이 마가복음 1장 1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때가 찾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하나님의 나라가 얼마나 중요하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첫 번째 행하신 설교의 메시지가 하나님의 나라였겠습니까?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모범 기도문 역시 이렇게 시작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역임을 받으시오며 나라의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죽은 뒤에나 가는 곳이 아니라 이 땅에서부터 일구어 가는 것이요.

 

바로 그것이 우리 신앙과 기도의 목표가 되어야 하멀 주님께서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히 일깨워 주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누가가 교회의 역사와 사도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 행전의 벽두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는 것으로 사도 행전의 내용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교회의 궁극적인 목적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고 전하는 데 있고 바로 그것이 주님께로부터 부른받은 사도들의 의무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나라는 영토, 국민, 주권을 필수적인 요건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 요건 중 그 어느 것이 빠져도 나라를 이룰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나라의 영토는 대체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언제, 어디로 가야 하나님 나라에 입국할 수 있는 것입니까?

2000년 전에 바리새인들이 똑같은 질문을 주님께 제기했을 때 주님께서 주셨던 답변을 누가는 누가 복음 17장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는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 세상의 영토를 땅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영토는 우리 각자의 심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조건도 대단히 간단합니다.

인간의 인생에 대한, 인류 역사에 대한, 우주 만물의 섭리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주권을 인정하는 자라면 그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의 심령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이 세상 특정 국가의 영토 속에서 태어나거나 특정 국가 국민의 자식으로 태어나면 해당 국가의 국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주권을 인정하지 아니하는 자라면 아무리 동일한 영토 속에 그하는 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나라를 얻고 누릴 수는 없습니다.

세상 나라의 주권은 흥망성쇄를 거듭합니다.

그러나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주권은 절대 불변입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하나님의 절대 주권 속에 그하기만 하면 그의 상황과 상관없이 그가 저에 있는 공간과 상관없이 그는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심령 속에 임하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제약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대상이신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며 살아간다고 하는 것은 영이신 하나님 다시 말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 안에 그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이 세상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를 일구는 교회도 사도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을 시작하면서 1장 1절에서부터 8절에 이르기까지 2절, 5절, 8절을 통해 성령님을 세 번이나 언급했습니다.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요하는 물로 세례를 베풀어서나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오원주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교회의 역사와 사도들의 행적을 밝혀주는 사도행전의 서두에 이 짧은 문장 속에서 누가가 세 번씩이나 성령님을 되풀이한 것은 성령님 안에 그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교회를 이루거나 사도의 삶을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님 안에 그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삶의 전반에 걸쳐 매 순간마다 자신과 함께 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자신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들 속에 자신을 향한 성령님의 뜻이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지난달 초에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다루에살렘에서 사역하고 있는 조남설 선교사님으로부터 메일을 한 통 받았습니다.

조선교사님의 허락을 얻어서 그 내용을 이 시간 여러분들에게 읽어 드리겠습니다.

얼마 전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에 저희 가족을 도우미로 사용하셨기에 목사님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 싶어 이 글을 보내드립니다.

지난달 다루에살렘항에 선교선박 둘로스호가 정박하여 3주 정도 머물다 갔습니다.

그래서 저희 가족도 말로만 듣던 둘로스호를 둘러볼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둘로스호를 방문하기 전날 딸 혜연이의 후배인 바울이 우리 집에 놀러 왔습니다.

그날 밤 늦게 바울 어머니가 전화를 하여 집에 갑자기 손님들이 오셨다며 바울을 우리 집에서 좀 재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우리 집에서 잠을 잔 바울은 이튿날 둘로스호 방문에도 우리 가족과 동행하게 되었습니다.

둘로스호 내부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헌신하고 있는 한국인 형제 자매들을 만나보고 막 떠나려는 즈음 바울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이 지금 모처에 있는데 바울을 그곳으로 데려다 주면 좋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전혀 예정에도 없던 우리 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서 바울을 내려주게 되었습니다.

아내는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슈퍼에서 장을 보고 가자고 했습니다.

장보기를 마치고 귀가하기 위해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았을 때입니다.

이상하게도 평소에 제가 늘 다니던 길이 아닌 해안길을 따라가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들어 그 방향으로 핸들을 돌렸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왜 다른 길로 가느냐며 단 볼일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그냥 이 길로 마음이 쏠리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며 한적한 해안길로 접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흑인 한 명이 길 한복판에서 두 팔을 번쩍 들고는 제 차를 가로막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대부분 노상강도이기에 차를 세우지 않는 것이 통례입니다.

그러나 좁은 도로 한가운데 버티고 있는 흑인을 피할 길이 없어 서서히 차를 멈추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흑인 외에 도로가에 또 한 사람이 보였습니다.

한 동냥인이 머리와 팔이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쭈그리고 앉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혜연이가 소리쳤습니다.

아빠 둘로스호에서 인사한 한국 분이시야.

그 한국 청년은 홀로 개인전도를 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다니다가 그곳에서 강도에게 봉변을 당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가족은 급히 그 청년을 차에 싣고 병원 응급실로 질주했습니다.

이곳에서는 병원 수술 전 반드시 수술비 일부를 선납해야 되는데 마침 우리에게 약간의 돈이 있어 그 돈으로 청년은 응급수술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얼마 후 우리의 연락을 받은 둘로스호 관계자들이 병원에 도착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제 차가 해안길로 접어든 순간은 강도들이 한국 청년의 머리와 팔을 찌르고 막 도망간 직후였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곳을 조금 빨리 통과했거나 반대로 늦었더라면 그는 심한 출렬로 인해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사건에 저희들을 개입시키시려 전혀 예상치도 않았던 일들을 계속 만드셨습니다.

느닷없는 바울의 방문, 바울을 우리 집에 재워달라 하고 이튿날엔 엉뚱한 곳으로 바울을 데려다 달라던 바울 어머니의 부탁, 예정에도 없던 아내의 장보기, 갑자기 해안도로를 따라가고 싶었던 제 마음, 자동차의 속력과 신호등까지 생각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오묘하신 역사와 완벽한 타이밍에 전율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강도의 칼에 찔려 머리 뒷부분이 찢어지고 왼쪽 팔목 힘줄 4개가 끊어졌던 그 청년은 수술 후 일주일 만에 퇴원하였습니다.

다행히 뇌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팔도 몇 주 후면 완전 회복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전화를 통해 이번 사건으로 절묘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면서 다루의 살람에서 다른 사람은 상상치도 못한 큰 간증과 은혜를 누리고 간다며 기뻐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저 개인적으로는 자동차의 속력과 신호등의 시간마저도 성령님께서 주관하심을 새삼스레 깨달았기에 조급함이나 서두름이 없이 삶의 여유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조남설 선교사님이 해안길에서 피투성이가 된 한국 청년을 구출해 낼 수 있었던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치부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 선교사님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전날 밤부터 자기 삶 속에서 연이어 일어났던 모든 일들 심지어는 자동차의 속력과 신호등의 길이 마저도 성령님의 역사로 받아들였습니다.

성령님 안에 관한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자기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성령님의 역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조 선교사님이 이처럼 자신의 삶 속에서 치밀하게 당신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성령님을 매 순간 의식하고 살아가는 한 그분의 심정 속에 어찌 하나님의 나라가 흥황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고백처럼 삶의 여유를 누리면 말할 것도 없고 성령님 안에서 매일 엮어지고 있는 자신의 삶 자체가 기적 덩어리로 받아들여지지 않겠습니까?

 

혹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정말 그처럼 우리 각자의 삶을 주관하신다면 왜 시간을 좀 더 정확하게 조절하셔서 아예 그 한국 청년이 강도의 습격을 받지 않도록 해주시지는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전등하신 하나님의 영의신 성령님께서는 물론 그렇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그 한국 청년은 성령님께서 자신의 위험을 막아주셨음을 전혀 인식도 못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그러나 강도의 습격으로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그 위급한 순간으로부터 자기를 구원해 내시기 위해 성령님께서 그 전날반부터 치밀하게 역사하셨음을 그는 현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청년에게 어느 쪽이 유익합니까?

자신이 인식하지도 못하는 가운데에 성령님에 의해서 위험을 모면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강도의 습격으로 인해 신비로운 성령님의 실제를 자신의 삶으로 확인하는 것입니까?

두말할 것도 없이 후자입니다.

그 사건으로 인해서 그 청년은 날마다 자신의 삶을 붙들고 주관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매 순간순간 의식하며 살아갈 것이오.

 

결과적으로 성령님 안에 그하는 그 청년의 심경 속에는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가 충만할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나의 계획이 이루어질 때는 말할 것도 없고 나의 계획이 무참하게 무산되고 뜻밖의 해를 입는 경우에도 그 속에 성령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읽고 전하는 사도일 수 있고 교회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 사람만 불신자와 그 삶이 친정으로 구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 화요일에 양재 횃불회관에서 예수원 설립 40주년 기념 고 대천덕 신부님 추모 음악회가 모테트 합창단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그 순서 중에 생전의 대천덕 신부님 모습을 기리는 영상이 잠깐 소개되었는데 그 영상을 시작하는 서두 문구가 대단히 감동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만지기 위해 예수원으로 갑니다.

예수원에 있는 강원도 황지는 한국의 오지 중의 오지입니다.

그런데 지난 40년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 산골짜기를 찾아갔습니다.

아마 이 자리에도 그곳에 다녀오신 분들이 수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유는 단 한가지였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고 만지기 위함이었습니다.

어떻게 한국의 오지 그 산골짜기 속에서 그런 일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성공회 소속인 대천덕 신부님께서 일평생토록 하나님의 절대주권 속에서 성령님 안에서만 거하셨기 때문입니다.

오지 자신의 삶을 주관하시는 성령님만을 의식하고 일평생 사셨기에 사람들은 그분의 삶을 통해 배운하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볼 수 있었고 강원도 오지 그 불편한 예수원에서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평강을 맛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실체를 보고 경험하게 해 주었던 대천덕 신부님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교회여 사도임에 분명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으신다면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인정하십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 안에 거하십시다.

매일매일 삶의 전반에 걸쳐 우리의 삶을 주관하고 계시는 성령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십시다.

자동차가 지체되고 신호등의 길이 속에서도 성공과 기쁨 뿐 아니라 실패와 고통 속에서도 나를 위한 성령님의 역사가 있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이십시다.

그때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 세상에 배어날 것이오.

우리는 이 시대를 정화하는 우리 시대의 진정한 교회와 사도로 이 혼탁한 도심 속의 예수원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부활하신 후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거듭 가르쳐 주신 주님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지 않다면 설령 우리에게 엉망감이 있다 한들 우리는 고작 내일의 시체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비록 우리에게 진은 진인 것이 없을지라도 우리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 있다면 우리가 어느 곳에 있든 바로 그곳이 에덴 동사님을 알게 해 주심도 감사드립니다.

우리의 행복은 우리 외부의 조건이나 상황에 달린 것이 아니라 우리 심령이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있는지의 여부로 가려짐을 일평생 잊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나의 생사 화복과 인류의 역사와 우주 만부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습니다.

절대주권자이신 하나님의 영 성령님께 나의 삶을 온전히 의탁합니다.

나의 삶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나를 위한 성령의 역사임을 믿습니다.

성령님에 의해 엮어지고 있는 우리의 삶 자체가 기적 덩어리임도 믿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고 전하는 이 시대의 교회와 사도로 도심 속의 예수원으로 살아가는 기쁨을 날마다 누리게 도와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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