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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3-5

 

 

사도행전 1:3-5

3 그가 고난 받으신 후에 또한 그들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살아 계심을 나타내사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4 사도와 함께 모이사 그들에게 분부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서 들은 바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5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라

 

100주년 기념교회 2005년 9월  4일 이재철목사님 설교 말씀 기록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함께 나누길 원합니다

100주년 기념교회 설교영상 및 음성파일(바로가기)

 

 

 

[이재철목사] 사도행전(7) 1:3-4 '사심을 나타내사' 설교 말씀 기록 (1/2) 은혜의 말씀

 

예수님께서 못 바뀌시고 돌아가신 지 사흘째 되는 새벽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을 때 이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힌 여인들에게 천사가 한 말을 누가는 누가복음24장에서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어찌하여 산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나니라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같은 장면에 대한 마태복음은 보다 명료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의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의 누우셨던 곳을 보라 또 빨리 가서 그의 제자들에게 이뤄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고 너희보다 먼저 갈리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 하라 그런가 하면 요한 역시도 요한복음 20장과 21장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사용한 죽은 자로 번역된 헬라어 네크로스의 본래 뜻은 시체라는 말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부활이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시체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다고 부활했습니다.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왜냐하면 부활이라는 당시 헬라어에 대한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인식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거짓말이거나 황당한 신화가 아니라 또는 예수님께서 가사 상태에 빠졌다가 의식을 회복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못박이셨던 주님께서는 실제로 돌아가셨고 시신이 되셨다가 시신 가운데에서 살아나셨음을 당시의 사람 그 누구도 오해할 수 없도록 정확하게 증언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역시 오늘 사도행전 벽두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의 부활을 해받으신 후에 친히 사심을 나타내셨다고 표현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해를 받으셨다고 번역된 헬라어 파스코는 돌아가셔서 시신이 되었다는 의미의 또 다른 표현이면 두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가 이런 표현으로 사도행전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고 있는 그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단지 하나의 상징적 의미나 추상적인 개념 혹은 이론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결코 사도행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실제로 돌아가셨고 시신이 되셨다가 시신으로부터 다시 살아났음을 믿는 자만 그 삶이 교회와 사도행전으로 엮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핵심인 예수님께서 시신 가운데에서 살아나셨다는 것이고 기독교의 핵심 역시 바로 거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도 예배를 드리면서 사도신경으로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가운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우리 역시 2000년 전 누가처럼 예수 부활은 상징적 의미가 아니라 시신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셨음을 매주일마다 하나님 앞에서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입으로의 고백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돌아가신 주님께서 시신 상태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다시 살아나셨음을 그 삶으로 증거하고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자기 역시 언젠가는 공동묘지 속에 시체로 드러누울 수밖에 없다는 자기 실체를 인식한 사람입니다.

자신의 나이에 상관없이 마치 천년 만년 살 것 같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사도신경의 이 구절을 아무리 외워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개인적으로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가 어렵고 설령 맺는다 할지라도 그 관계가 깊어지기 어렵습니다.

언젠가 그날이 오면 나의 이 육체는 공동묘지 속에서 시체로 썩어 문드러진다는 사실을 단 한 번이라도 통감한 자만 시신 사이에서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믿으며 자신의 삶을 교회와 사도 행전으로 일구어 갈 수 있습니다.

공동묘지 속에서 썩어 문드러질 자신의 실체를 인식한 자에게는 바로 그 무덤 속 시신 상태에서 살아나신 예수님 이외에는 다른 구원자가 있을 수 없고 시신 상태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원히 살 수 있음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골로세서에서 4장 13절에 등장하는 도시 히에라폴리스는 전제 터키 파무칼레의 석회 붕 위에 건설되었던 옛 도시입니다.

히에라폴리스라는 도시의 이름은 신성한 도시라는 의미입니다.

석회 절벽 사이로 온천수가 흘러내리는 등 그곳 자연 환경의 신비로움 때문에 옛 사람들은 그곳을 신성한 곳이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먼 도시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자신이 죽은 뒤엔 히에라폴리스에 묻히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날 히에라폴리스 성 안은 철저하게 폐허임에도 불구하고 정문밖 북쪽 공동묘지에 가면 아직까지 무려 1200개에 이르는 각가지 형태의 석관들과 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그 모든 석관들은 다 뚜껑이 열려 있어서 아득한 옛날에 이미 도굴 당했음을 스스로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 석관들을 두번 방문했던 저는 시간관계상 제가 직접 찾아서 제 눈으로 확인해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그 공동묘지에는 이런 비문이 기록된 비석이 있다고 합니다.

'내가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어찌 이것이 2000년 전 로마 제국시대의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이야기겠습니까?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물론이요 미래에 태어날 모든 인간도 이와 똑같을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내가 살아 있다고 내일도 살아 있다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죽음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죽음이 나를 피해가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 죽음의 날과 시각은 사람마다 다 틀리겠지만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의 시계에서 초침이 1초 1초 흘러갈수록 그 시각은 우리 모두에게 시시각각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통감한 자라면 무덤 속 시신 가운데에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 주님을 쫓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창립 전 준비 예배를 드릴 때 잠시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만은 로마의 기독교가 카타콤 즉, 지하 묘소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합니다.

로마 교회의 토양은 응해질 토양입니다.

응해질 토양은 간단한 기구만으로도 쉽게 땅을 파 내려갈 수 있는 반면에 땅 속 응해질이 공기와 맞닿는 순간부터 계속 돌처럼 굳어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시체의 썩은 물과 모든 악취를 응해질 토양이 완전히 흡수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삽으로 흙을 파고 하관한 뒤에 봉분을 조성하는 것보다 2000년 전 로마 제국 사람들이 땅을 파고 내려가서 지하 묘소를 만드는 것이 훨씬 용이하고 위생적이었습니다.

그 지하 묘소를 찾아 내려가면 좁은 복도 좌우 벽에 관들이 4층 혹은 5층으로 안치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도 중간 중간에 작은 공간들이 나타납니다.

 

로마의 초기 기독교 교인들은 바로 그 공간에서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신앙과 그들의 예배가 얼마나 역동적이었을 것인지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온 사방 즐비한 관을 보면서 그들은 매일 자신들의 실체를 확인했을 것입니다.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이처럼 자신의 실체를 확인한 그들이 온 사방에 관이 즐비한 그 지하 묘소 한 가운데에서 시신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예배드렸고 그들이 죽음마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 부활의 증인으로 살았던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오늘 본문의 누가의 증언처럼 우리에게도 당신의 사셨음을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우리를 죄 가운데에서 건져 주셨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해주셨고 때마다 주님께 예배드리게 해주셨고 우리로 하여금 100주년 기념 교회를 이루게 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던 들 이 모든 일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일들이야말로 우리를 향한 주님의 확실한 부활의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증거와 은혜는 우리를 이곳 양화진 선교사 묘역으로 불러 예배드리게 해주셨다는 것입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역 하면 이름이 고상해 보이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공동묘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불러주신 이 공동묘지 한가운데에서 매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예배처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곳이야말로 21세기판 한국의 카타콤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2000년 전 지하묘 소속의 초기 기독교 교인들처럼 우리 역시 이 공동묘지 한가운데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주님 안에서 쫓으며 예수 부활의 증언을 우리의 삶으로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지하묘소의 크리스챤들을 통해서 로마 제국을 새롭게 하셨던 주님께서 양화진 공동묘지의 우리를 당신의 도구로 삼아 이 시대의 교회 행전과 사도 행전을 어찌 엮어 가시지 않겠습니까?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십시오.

저 묘역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지 않습니까?

나 어제 너와 같았으나 너 내일 나와 같으리라.

 

기도하시겠습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가 시신의 상태에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시고 살아나신 주님께서 우리 각자의 주님 되심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주님의 사심을 나타내어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이곳 양화진 묘역 한가운데 심어 주신 것을 진정으로 감사드립니다.

이곳이 21세기 한국의 카타콤이 되게 해 주십시오.

이곳에서 언젠가 무덤 속에 들어누울 우리 각자의 실체를 분명히 깨닫게 해 주시고 시신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쫓으며 살아가도록 도와 주십시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쫓는 우리의 삶을 통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이 양화진으로부터 온 사방으로 온 세계로 스며 나가게 도와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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